서기 881년(헌강왕 7년), 당나라에서 황소(黃巢)의 난(亂)이 일어나자 토벌총사령관인 고병(高騈)의 휘하로 있던 최치원이 ‘토황소격문(討黃巢檄)’을 지어 황소를 비판했다. 당시 황소가 이 격문을 읽다가 자신도 모르게 침상에서 내려앉았다는 일화가 있을 만큼 뛰어난 명문으로 평가된다. ‘토황소격문’은 ‘계원핑정(桂苑筆耕)’에 실려 전한다. 고운 선생은 재당 시절 반란을 일으킨 황소를 글로서 항복시켰다.
계원필경 토황소격문
계원필경 20권의 체재와 내용은 서문을 서두로 하여 권1·2에 표(表) 20수, 권3에 장(狀) 10수, 권4·5에 주장(奏狀) 20수, 권6에 당장(堂狀) 10수, 권7∼10에 별지(別紙) 80수, 권11에 격서(檄書) 4수와 서(書) 6수, 권12·13에 위곡(委曲) 20수, 권14에 거첩(擧牒) 50수, 권15에 재사(齋詞) 15수, 권16에 제문·서(書)·소(疏)·기 10수, 권17에 계(啓)·장 10수, 권18에 서(書)·장·계 25수, 권19에 장·계·별지·잡저 등 20수, 권20에 계·장·별지·제문·시 등 40수로 구성되었다.
계원필경집
고운 고집 상하권
고운 문집은 사단법인 고운국제교류사업회가 1974년 이후 45년 만에 출간되었다. 고운 선생은 삼교 융합이 아니라 바로 삼교를 융합시키는 또 하나의 종교로 선(仙) 풍류의 도(道) 논하고 있다. 유·불·도가 들어오기 이전에 한국 땅에는 그들을 받아들이고 번성케하는 현묘지도(玄妙之道)가 먼저이었다는 것이고 그것이 바로 최치원 사상이 유불도에 모두 회통하면서도 그것을 수용하는 바탕에 한국위 풍류도를 원형으로 삼고 있다. 지금까지 아시아의 가치라고 하면 다섯 마리 용이나 호랑이라는 경제적 부흥을 지칭하는 말이 되었지만 이미 보아 온대로 종교 갈등이 자아내는 21세기 문명충돌의 시대에 인류가 당면한 가장 절실한 덕목과 그 사상은 삼교융합의 원동력인 동방의 태평인인의 고운 사상이라고 할 수 있다.
이어령 前문화부 장관
계원필경집은 고운 최치원 선생이 당나라에서 회남절도사 고병의 종사관으로 지내면서 지은 공문성하 사문서 및 개인적인 시문 등 1만여 수 중에서 문서 31수, 시가 60수 등 370수를 취사 선택하여 엮어서 신나로 귀국한 다음 해에 왕에게 바친 문집이다. 계원(桂苑)은 문사들이 모여 있다는 뜻이며 필경(筆耕)은 종사관으로 일하며 짓는 일을 마치 농사짓는 일로 비유하여 책명으로 삼은 것이다. 이 문집은 현전하는 우리나라 문집중에서 가장 오래되었으며, 한국 고대 문집 중, 그 내용이 가장 풍부하다. 따라서 고려 시대 이규보는 최치원을 동국(東國) 문학의 조종(朝宗)이라고 극찬하였다. ‘계원필경집’의 문서는 신라와 고려 시대에 공문서를 작성하는데, 하나의 양식을 이루었으며, 시문은 문인들의 문장을 짓는데 전범(典範)이 되었다. 이는 그 내용에 있어 수많은 전거를 인용하고 있으며, 그 글이 실용적이었기 때문이다.
최광식, 前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고려대학교 교수